[감격]마음 글, 따뜻한 글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선생님

예수님 사랑 2006. 8. 25.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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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사랑과 희생 그리고 사욕을 멀리하며 살았던 사람

 

시대가 각박해지고 자기 소유만을 배불리고, 나눔과 희생이 실종된 “볼멘소리의 시대”에 인생을 역으로 살아간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은 행복한 마음이다. 내 블로그에 좋은 글을 올리려고 ‘블로그 이웃’에게서 가슴 뭉클한 사진을 찾아냈다. 그것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장기려 박사님 (1911~1995년) 관련 사진이었다. 무소유, 희생과 사랑, 가난한 자의 대변인으로 살았던 그분, 갑자기 내 마음이 뭉클했다. ‘그렇구나 우리에게도 이런 분이 계셨지.’

나는 서재의 한 구석에서 빛바랜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장기려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요약한 책이다. 그분은 생전에 박사, 원장, 회장 등의 호칭보다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하셨다. 성산 장기려 선생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고, 범인보다 한층높은 수준의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그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 모범이여 스승이다.

 

성산(聖山) 장기려 선생님은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에 생을 마치기까지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진정한 의미의 봉사의 삶을 살다 간 ‘참의사’였다. 그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병원장으로 40년, 간호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 돈과 사욕을 멀리 한 채 말년에는 병원(고신의료원) 10층의 24평 남짓한 사택에 거주하며 가진 것 없이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또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켜 45년을 홀로 지냈다.

장기려 선생님은 6·25 전쟁 중, 평양 의과대학부속병원 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돌보다가 어쩔 수 없이 국군 장병들과 함께 차남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다섯 자녀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 후 그는 늘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계속 혼자 살았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이런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 박사님의 심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에게서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가 이런 마음자세요 성품이다.

그는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산상수훈과 황금률 같은 가르침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현실을 모르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인 삶은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교과서적인 삶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달라는 자에게 주는’ 그러한 사람이었으며, 필요한 자를 찾아서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는 자신의 것을 포기해야 했으며, 무소유적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소유적 삶은 그를 “위대한 성자”라는 수식어를, 그의 선하고 양심적이며 헌신적인 의료행위는 그에게 “한국의 슈바이쳐”라는 별명을 붙게 했다. 그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된 배경은 신앙교육에 있었다. 특히 할머니의 영향을 깊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모에 대하여 회상하기를 “할머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독실히 믿는 분이어서 입암동에 세우는 교회에 많은 연보를 하셨던지 그 예배당 대들보에 할머님의 이름이 씌여졌던 것이 생각난”라고 했다.

그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할머니의 믿음과 기도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성경에 나타난 인물에 대하여 옛 이야기로 듣고 자신을 성경의 역사적인 인물에 동일화시켜 생각했던 것이다. 장기려 선생님은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야곱과 요셉,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요셉의 이야기’는 그에게 무소유의 경제관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어린시절은 그의 조부 대에 치부(?)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남의 마름을 지낸 할아버지가 당대에 4백석을 했으니 좋게 번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후에 아버지가 별 잘못도 없이 그 4백석지기를 다 날린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라고 술회한다. 이는 자신의 가계사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에 입각한 의미를 투영한 해석이기도 하거니와, 그 가산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그의 재물에 대한 무소유적 관점 때문일 것이다.

장 박사님은 치료비가 없어서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돌려보내기 일쑤여서 항상 병원 행정직원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는 언제나,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사셨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장 박사님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님에게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장 박사님은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하였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장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하였다.

그의 병원에 한 농부가 입원을 했을 때의 일이다. 그 농부는 건강을 회복하고도 퇴원을 할 수가 없었다. 워낙 가난한 형편이라 입원비를 낼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생각하다 못한 농부는 장 박사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해 보기로 했다.
  “선생님 이제 곧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병원비를 다 내야 집에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희 집은 제가 있어야 농사를 짓습니다. 선생님, 제가 돈을 벌어서 꼭 갚을 테니 제발 퇴원시켜 주시면 안될까요?”
농부의 사정을 딱히 여긴 장 박사님은 이런 제안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밤에 문을 열어 놓을 테니 살짝 도망치세요.”

그리고 다음 날, 장기려 박사님은 농부와 약속한 대로 원무과 직원들이 퇴근한 틈을 타 병원 뒷문을 열어 두었다. 농부가 몰래 집에 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농부의 손에 그가 따로 마련한 돈을 쥐어 주기도 했다.
  “이거 얼마 안됩니다. 차비라도 하세요.”
농부는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원무과 직원이 장 박사에게 찾아와 농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 106호 환자가 간밤에 사라졌습니다.”

장 박사님은 멋쩍게 웃으며 간밤의 일을 고백했다.
  “다 나은 환자를 마냥 붙들고 있을 순 없지 않나. 한창 바쁜 농사철인데, 안 그런가?”
잠시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원무과 직원의 얼굴에는 금세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던 장기려 선생님. 그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한 이 하나님 앞에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선생님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이광수는 장기려 선생님을 가리켜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장기려 박사님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95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고 비문에는 그분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벗’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간, ‘이 땅의 작은 예수’ 로 칭송받은 사람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드러내지 않고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장기려 선생님의 파란만장한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한 귀감이 될 만하다. 본 받을만한 어른이 없는 이 시대에 진정한 의인이요 스승이라 할 수 있다.

 

글* 나관호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북칼럼니스트, '나는 이길 수밖에 없다' 저자)